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일당독재]] 아래의 점진적 자유화 ==== 전임자 흐루쇼프는 소련을 지배하던 스탈린 우상화를 종식하고, 자유화를 이끌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집권한만큼, "흐루쇼프 해빙기"의 여러 자유화 조치를 폐지하기는 했으나, 스탈린식 공포정치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았고, 흐루쇼프가 지향한 자유화는 계속 이어나갔다. 스탈린 시절에는 파벌 싸움에서 지면 [[레프 트로츠키|암살]]당하든 [[니콜라이 부하린|사형]]당하든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지만, 흐루쇼프 때부터 이것이 점차 순화되어 브레즈네프 시대에 이르러서는 파벌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평당원이나 야인으로 강등만 되어 연금을 받으며 집에서 유유자적할 만큼 온건해졌다. 한 역사가는 이를 “정치가들의 파벌 싸움이 피비린내 자욱한, 목숨을 건 치열한 [[결투]]에서 신사들끼리의 스포츠 게임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브레즈네프 시절에는 권력투쟁이 상당히 온건화되어 실각하더라도 그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실각이나 파면정도에 그쳤다. 실각이나 하야한 사람은 한직으로 가거나 연금을 받는 은퇴자로 살아갔다. 실각해서 권력을 잃은 고관들의 연봉은 현직에 준할정도로 꽤 높았다. 그러니까 권력투쟁이 있었다고 해도 패배한 사람은 스탈린 시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당하지 않았다.[* 다만 이전 최고권력자였던 흐루쇼프는 브레즈네프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보 당국에 의한 지속적인 감시는 받고 있었다.] 코시긴이나 포드고로니와 같이 브레즈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다가 야인이 된 인물들은 그냥 실각 수준이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유유자적하며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들이 실제로 곤경을 겪은 것은 브레즈네프시기가 아니라 소련체제의 위기로 연금이 끊기는 1980년대 말기였다. 물론 브레즈네프 자유화는 서방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반체제적인 언론이나 출판물은 금지되었고, 의회 민주주의나 다당제를 주장하는 운동가들은 탄압을 받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스탈린 시절처럼 고문, 처형, 투옥되는 게 아니라 거주지 이전조치, 정신병원 감금에 그쳤다. 그것도 안되면 아예 서방국가로 추방했다. 다만 브레즈네프가 본의 아니게 오명을 산것은 소련 라디오텔레비전 위원회 의장(국영방송사 사장)인 세르게이 라핀(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пин)과 후에 서기장을 지내게 된 유리 안드로포프가 심의와 검열을 강화하면서 소련 연예계가 그 영향을 받았기때문이다. 세르게이 라핀이 1970년부터 1985년까지 15년 동안 소련 라디오텔레비전 위원회 의장직을 맡을 동안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심의에 반영한데다가 문화적으로 유대인예술가들을 방송에서 배제하는 등의 행동도 같이 일삼았던지라 그런 평가가 나왔던 것이다. 당시 서구권에서 68혁명의 영향을 한창 받던 시절인데다가 미국과 영국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된 1980년대에도 방송심의만큼은 케이블 방송 발달의 영향으로 그렇게 보수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 상황에서 소련은 과거의 방송심의기준을 고수하다보니 불평이 나오지않는게 이상했다. 그렇지만 라핀이 브레즈네프의 취향에는 잘부합했기 때문에 의장으로 장수할수는 있었다. 애플바움의 논픽션 〈굴라그〉에 따르면 이때 당시도 [[굴라크]] 체제는 변함없이 가동되었지만, 스탈린 시대와는 다르게 반체제 유명 인사가 굴라크에 수감되거나, 좌천되어 노동현장에 떨어지더라도 서구의 지속적인 관심과 구명 요청 및 생사확인이 가능했던 시대다. 굴라크 대신에 정신병원에 대신 가둬넣었고 많은 반체제 인사들은 정신병자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주기도 했다. 또는 [[컨테이너]]에서 살게 하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굴라크에 가는 사람들은 정치범이 아니라 노동을 통한 교화라는 명목으로 파렴치범이 대상이었다. 위험분자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으며, 시위와 같이 직접 행동에 나서면 연금하거나 근무지를 북극권 혹은 중앙아시아로 보내는 방법으로 간접적인 탄압을 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집권기에 동네북 취급이었던 스탈린을 집권 초기에 어느 정도 재평가 시도를 하였다. 1966년에는 자신의 직함인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다시 바꾸었고, 1970년에는 스탈린의 무덤에 스탈린의 흉상을 세워서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된 다른 소련 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스탈린 시절]]의 [[대숙청|피해자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던 시절이고[* 1966년에는 대물리학자 이고르 탐(195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과 표트르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스탈린 복권에 반대하는 편지를 브레즈네프에게 쓰기도 했다.], 1957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주도하에 [[게오르기 말렌코프|말렌코프]], [[니콜라이 불가닌|불가닌]],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보로실로프]], 사부로프, 페르부힌, 셰필로프 등 인물들이 흐루쇼프에게 도전하다 숙청당해 버리는 등의 이유로 스탈린주의적인 인물들이 사라졌으므로 정치국 내 입지를 다지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브레즈네프는 스탈린 복권 시도로 생기는 강한 반동에 도전하는 것이 정치적 큰 무리라 판단하고 포기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흐루쇼프의 숙청으로 대체된 인물이 브레즈네프와 그의 최측근인 [[안드레이 그로미코]]이다.] 이로 인해 흐루쇼프 시절 폐기되었던 스탈린식 공산주의 발전은 브레즈네프 시기에도 여전히 불가능해 졌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고식적 공산주의 전진만 이어나가게 되며, 소련은 [[공산주의]]에의 도달이 멀어지며 점점 침체되어 간다.[* 흐루쇼프는 1980년에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에 돌입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결국 소련은 해체될 때 까지 공산주의는 고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도 한참 못 미치는 과도기적인 형태로 끝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스탈린 재평가는 실패하여 스탈린 시절 스탈린그라드라 불리던 [[볼고그라드]]의 명칭은 브레즈네프 시기에 계속 유지되었고, 1977년에 [[소련 국가]]의 가사를 다시 제정했을 때 가사에 스탈린의 이름이 빠졌다. 또한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스탈린의 친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가 회고록 등을 발간하고 다녀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브레즈네프 본인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듯 흐루쇼프를 탐탁치 않게 여긴 당내 보수파들이 옹립한 인물이었음에도 브레즈네프의 집권 기간은 오히려 흐루쇼프식 수정이 더 확장되어 가는 시기였으며 실제 정책에서 흐루쇼프식 수정이 취소될 수 없었다. 이는 흐루쇼프식 수정 이후를 "현실사회주의"라고 칭했던 것과 같이 당시의 소련 관료들이 보기에도 스탈린 집권 당시에 통용되었던 형태의 이념에는 분명히 '''비현실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소련의 굴라크 문제는 흐루쇼프가 집권하던 시기에도 겉으로만 해결했다고 선전했을 뿐 실제로는 다소 형태만 바뀌어서 그대로 존속했으나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굴라크들이 일부 철거되는 등 실질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